
한민규 기자 |
지난 4월 24일 화성행궁에서 우화관(于華觀)과 별주(別廚)가 복원되어 개관식을 가졌다. 우화관은 화성유수부의 객사였으며, 별주는 국왕 행차시 필요한 음식을 준비하고 관련된 문서를 보관하는 장소이다. 이로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훼손되고 파괴되었던 수원 화성행궁이 완전한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화성행궁은 조선 22대 국왕인 정조가 1789년(정조 13년) 10월 아버지 장조(사도세자)의 묘를 수원부 읍치 자리(현재 화성시 화산동)로 이장하고 신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옯기면서 건립되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관청으로 쓰이다가 국왕이 행차하는 특별한 날이면 궁실로 이용되었다.
<조선후기 개혁정치와 왕권강화로 조선의 부흥을 이끈 왕, 정조>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와 더불어 조선후기 개혁정치와 왕권강화로 조선의 부흥을 이끈 왕이다. 장용영을 두어 왕권을 강화했고, 규장각을 설치하여 인재를 양성했다. 실학자와 서얼 출신의 학자들도 채용되었는데 주요 인물은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그리고 서이수 같은 사람들이다. 또한 초계문신 제도를 두어 젊은 인재를 발탁했다. 이렇게 발탁된 대표적인 초계문신이 정약용, 정약전 형제와 채제공의 아들 채홍원 등이다.
규장각에서는 많은 서적을 간행했다. 대표적인 책이 각종 의궤와 군사훈련을 다룬 <무예도보통지>, 송시열의 문집 <송자대전>, 이순신장군의 문집을 정리하여 <이충무공전서>를 발간했다. 이순신의 일기를 정조가 <난중일기>라 명하여 오늘날 우리가 아는 <난중일기>가 탄생했다. 그리고 정조의 글을 정리한 <홍재전서> 등도 규장각에서 간행되었다.
<정조의 이상이 깃든 화성! >
또한 정조는 화성행궁 주변으로 화성을 축조하며 신도시를 건설했다. 화성은 1794년 착공하여 1796년 완공되었는데,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ha로 동쪽 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성이다. 화성 축조와 관련하여 건설 과정 및 기타 제반사항들을 모두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여 남긴 《화성성역의궤》가 정조 사후인 1801년(순조 1년)에 간행됐다.

정조는 화성을 단순한 군사적 기능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자신의 개혁정치를 구현하는 무대로 삼고자 했다. 화성을 포함한 수원 일대를 자급자족 도시로 육성했으며, 국영 농장인 둔전을 설치했고, 경작을 위해 몇 개의 저수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곳에 선진적인 농법 및 농업 경영 방식을 시험적으로 추진했다. 상업에서는 신해통공 조치로 물산을 독점하던 육의전의 금난전권이 폐지되었다. 이 때문에 자유로운 상행위가 가능해지는 등 화성은 개혁의 시발점이자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정조의 애민정책 시험대였다.
수원 화성은 사적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 화서문, 서북공심돈, 방화수류정 등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1997년 12월 뜻있는 수원시민들의 노력과 헌신에 의해 수원화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수원화성박물관>
화성행궁 광장에서 창룡문 방향으로 매향교를 지나면 수원화성박물관이 있다. 수원화성박물관은 세계유산 수원화성의 우수성과 신도시 건설에 담긴 정조의 개혁정신을 알리기 위해 2009년 4월 27일 개관한 전문 박물관이다.

수원 화성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수원 화성과 정조의 행적과 애민사상을 소개하고 있다.
수원화성박물관은 상설전시 공간은 수원화성 축성과 신도시 발전과정을 볼 수 있는 화성축성실, 1795년 을묘년 수원행차와 정조의 충신 채제공, 수원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영과 방어체계의 우수성을 소개하는 화성문화실, 박물관 밖에 거중기와 녹로 등 수원화성 축성에 사용된 기기들을 실물 크기로 전시하고 있다.
그리고 어린이체험실을 상설로 운영하고 있고, 정기적으로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여 문화체험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